Photoessay
슬픔이라는 흰 종이 / 이기철
hanulche
2015. 2. 11. 13:19


슬픔이라는 흰 종이 / 이기철
맑은 것은 슬프다
슬픔은 숨겨 둔 눈부심 같아서
찬란을 색칠하려 해도 색깔이 묻지 않는다
이슬은 깨어질지언정 더러워지지 않는다
누구의 발자국도 찍힌 적 없는
깨끗하고 흰 종이인 슬픔
내 오래 사숙해 온 스승이여
너에 엎드려 구걸한 내 미분(微分)의 시간은 아직 어리다
동풍으로 다가와 삭풍이 되는
파리하고 차가운 손
때로는 상한 사과 냄새를 풍기고
때로는 줄 끊어진 악기 소리를 내는 너는
이름할 수 없는 애인
어떤 글자로도 쓸 수 없는
무문(無文)의 흰 글씨
내 오늘 다시 너를 맞아 이 글을 베끼노니
애절 비탄 비애보다 깨끗한 몸이여
슬픔이라는 창백한 종이여
너 아니면 내 무엇으로 삶의 깊이를 재느냐
-시집 『나무, 나의 모국어』(민음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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