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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2 / 기형도

hanulche 2019. 11. 11. 15:12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2 / 기형도

 

슬프구나
벌레 먹은 햇빛은 너무도 쇠잔하여
마른 풀잎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이제 한 도막 볏짚만큼 짧은 가을도 숨죽여 지나가고
적막한 벌판에 허수아비 하나 남아
마른 수건처럼 쓸쓸한 가을 임종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
그리하여 앙상한 빈 들엔 시간이 가파르게 이동하고
이치를 아는 바람의 무리만이
생각난 듯 희뜩희뜩 떠다닐 것이다.
곧 밤이 되리니 겹쳐 꾸는 꿈속에서
암초에 걸린 맨발로
핼쑥한 하얀 달 하나 떠오르고
기진한 덩굴손 같은 달빛 몇 줄기로
단단히 동여맨 가을의 시체를 끌고 이리저리 떠돌다
새벽이면 세상 빈자리마다
얼어붙은 땀을 쏘며 사라질 것이다.
죽음이여, 그러나 언제 우리가
너를 두려워했던 적이 있었던가
상식으로 무장한 이 세상에서
새로 태어나는 것이 어디 있으며 새롭게 소멸하는 것이
무엇이냐. 오, 지폐처럼 흩날리는 우리의 생애 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는
숱한 겨울과 싸워 이겨왔던 것이냐, 보아라
畢生의 사랑을 껴안고 엉켜 쓰러지는 일년초의 아름다움이여.
불어라, 바람아 우리가 가을을 잃은 부족으로 헤매이다
바람아, 불어라 어느 시린 거리에서 풀썩이는 꽃처럼 쓰러져도
힘차게 튕겨지는 씨앗의 형상으로
우리는 견고하게 되살아나
불어라 바람아, 우리 몸이 가장 냉혹한 처형의 창고에 던져지고
바람아 불어라, 우리 목숨이 식은 노을 퍼붓는 거리에서
한 장 얼음으로 결박될지라도
아, 그러나 그 무엇이 다가와
槍날같이 부릅뜬 우리의 눈빛을 거두겠는가
죽었는가, 장엄한 우리여, 누가 우리를 죽음이라 부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