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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빨랐지 그양반...이정록

hanulche 2015. 8. 10. 17:36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 자 물어본 게 단 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 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녁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 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월남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 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 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