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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病 ...장석주Photoessay 2015. 9. 7. 20:47
가을病 ...장석주
아우는 하릴없이 핏발선 눈으로
거리를 떠돌았다. 누이는
몸 버리고 돌아와 구석에서 소리없이 울었다.
오, 아버지는 어둠 속에
헛기침 두어 개를 감추며 서 계셨다.나는 저문 바다를 적막히 떠돌았다.
검은 파도는 섬기슭을 울며 울며
휘돌아 사납게 흰 이빨을 세우고
물어뜯어도 물어뜯어도 절망은 단단했다.너무 오래 되어서 낡은 이 세상
가을해 떨어져 저문 날의 바람 속으로
마른 들풀 한 잎이 지고 어둠이 오고
나는 얼굴 가득히 범람하는 속울음 참았다.살 부비며 살아온 정든 공기와
친밀했던 집 구석구석의 생김생김
아우와 누이와 아버지가
작은 불빛 몇 개로 떠올라
바람에 하염없이 쓸리는 것을 보았다.오, 그때 세상에는 좁혀지지 않은 거리가 있다는 걸 알았다.
가을 저문 바다의 섬과 섬 사이
그 사이를 채우고 있는 것은
어둠과 바람과 파도뿐임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