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 곳에의 그리움 ... 전혜린
그것이 헛된 일임을 안다
그러나 동경과 기대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무너져 버린 뒤에도 그리움은 슬픈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나는 새해가 올 때마다 기도한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어떤 엄청난 일, 무시무시하도록 나를 압도 시키는 일,
매혹하는 일.
한마디로 나는 '기적'이 일어날 것을 나는 기대하고 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모험 끝에는 허망이,
여행 끝에는 피곤만이 기다리고 있는 줄은 안다.
그리움과 먼 곳으로 훌훌 떠나 버리고 싶은 갈망.
바하만의 시구처럼 '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
아무 곳이나 떠나고 싶은 것이다.
먼 곳에의 그리움(Fernweh)!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 !
텅 빈 위(胃)와 향수를 안고
돌로 포장된 음습한 길을 거닐고 싶은 욕망.
아무튼 낯익은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모르는 곳에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항상 나에게는 있다.
한권의 책이 마음에 들 때
내 맘에 드는 음악이 들려올 때
마당에 핀 늦장미의 복잡하고도
엷은 색깔과 향기에 매혹될 때
또 비가 조금씩 오는 거리를 걸었을 때
나는 완전히 행복하다
맛있는 음식
진한 커피
향기로운 포도주
생각해 보면
나를 기쁘게 해 주는 것들이 너무 많다
-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中 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