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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피로감, 행복한 피로감Bookmark 2019. 8. 27. 08:59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했지만 차도가 없는 암환자에게 의사는 무슨 말을 할까 떠올려 보았다. 그러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는 슬픔에 젖어 있다고. 나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에 지쳤고 누군가를 상실하는 데 진절머리가 났다. 왜 이렇게 지독한 피로감을 느끼는지 이유를 생각하다 얼마 전 내 머리카락이 모두 빠졌을 때가 떠올랐다. - 니나 리그스의《이 삶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중에서 - * 때때로 '행복한 피로감'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운동을 즐겁게 마쳤을 때, 또는 여행을 잘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몰려오는 피로감. 바로 행복한 피로감입니다. 그러나 '지독한 피로감'은 위험한 신호입니다. 더 지독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평소 '행복한 피로감'을 느끼는 일을 반복하는 것도 '지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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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류시화Photoessay 2019. 8. 24. 14:22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류시화 세상을 잊기 위해 나는 산으로 가는데 물은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버릴 것이 있다는 듯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듯 나만 홀로 산으로 가는데 채울 것이 있다는 듯 채워야 할 빈 자리가 있다는 듯 물은 자꾸만 산 아래 세상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눈을 감고 내 안에 앉아 빈 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이는 걸 바라봐야 할 시간 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 - Frank Mi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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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었는가 우리가/류시화Photoessay 2019. 8. 24. 14:20
잊었는가 우리가/류시화 잊었는가 우리가 손잡고 나무들 사이를 걸어간 그 저녁의 일을 우리 등 뒤에서 한숨지며 스러지던 그 황혼의 일을 나무에서 나무에게로 우리 사랑의 말 전하던 그 저녁새들의 일을 잊었는가 우리가 숨죽이고 앉아서 은자처럼 바라보던 그 강의 일을 그 강에 저물던 세상의 불빛들을 잊지 않았겠지 밤에 우리를 내려다보던 큰곰별자리의 일을, 그 약속들을 별에서 별에게로 은밀한 말 전하던 그 별똥별의 일을 곧 추운 날들이 시작되리라 사랑은 끝나고 사랑의 말이 유행하리라 곧 추운 날들이 와서 별들이 떨어지리라 별들이 떨어져 심장에 박히리라 White Water - Celtic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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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태어난 슬픔/류시화Photoessay 2019. 8. 24. 14:18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류시화 넌 알겠지 바닷게가 그 딱딱한 겁질 속에 감춰 놓은 고독을 모래사장에 흰 장갑을 벗어 놓는 갈매기들의 무한 허무를 넌 알겠지 시간이 시계의 태엽을 녹슬게 하고 꿈이 인간의 머리카락을 희게 만든다는 것을 내 마음은 바다와도 같이 그렇게 쉴새없이 너에게로 갔다가 다시 뒷걸음질친다 생의 두려움을 입에 문 한 마리 바닷게처럼 나는 너를 내게 달라고 물 속의 물풀처럼 졸라댄다 내 마음은 왜 일요일 오후에 모래사장에서 생을 관찰하고 있는 물새처럼 그렇게 먼 발치서 너를 바라보지 못할까 넌 알겠지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을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는 무한 고독을 넌 알겠지 그냥 계속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을 그것만이 유일한 진실이라는 것을 Bygone Love(영화 '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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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슬픔의 만다라/류시화Photoessay 2019. 8. 24. 14:15
사랑과 슬픔의 만다라/류시화 너는 내 최초의 현주소 늙은 우편 배달부가 두들기는 첫번째 집 시작 노트의 첫장에 시의 첫문장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나의 시는 너를 위한 것 다른 사람들은 너를 너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너를 너라고 부르지 않는다 너는 내 마음 너는 내 입 안에서 밤을 지샌 혀 너는 내 안의 수많은 나 정오의 슬픔 위에 새들이 찧어대는 입방아 위에 너의 손을 얹어다오 물고기처럼 달아나기만 하는 생 위에 고독한 내 눈썹 위에 너의 손을 얹어다오 나는 너에게로 가서 죽으리라 내가 그걸 원하니까 나는 늙음으로 생을 마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바닷새처럼 해변의 모래 구멍에서 고뇌의 생각들을 파먹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 내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내가 세계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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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게 안부를 묻다 / 류시화Photoessay 2019. 8. 24. 14:12
슬픔에게 안부를 묻다 / 류시화 너였구나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것이 인기척에 부스럭거려서 여우처럼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 슬픔, 너였구나 나는 이 길을 조용히 지나가려 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이 겨울숲을 떠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를 깨우고 말았구나 내가 탄 말도 놀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숲 사이 작은 강물도 울음을 죽이고 잎들은 낮은 곳으로 모인다 여기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또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잇다 한때 이곳에 울려퍼지던 메아리의 주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무들 사이를 오가는 흰새의 날개들 같던 그 눈부심은 박수치며 날아오르던 그 세월들은 너였구나 이길 처름부터 나를 따라오던 것이 서리 묻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까마귀처럼 놀라게 하는 것이 너였구나 나는 그냥 지나가려 했었다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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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류시화Photoessay 2019. 8. 24. 14:10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류시화 시를 쓴다는 것이 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 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였다 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 내 가슴에 피를 묻히고 날아간 새에 대해 나는 꿈꾸어선 안 될 것들을 꿈꾸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The Rose - Gheorghe Zamf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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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에 오는 첼로 / 박남준Photoessay 2019. 8. 6. 11:42
저녁 무렵에 오는 첼로 / 박남준 그렇게 저녁이 온다 이상한 푸른빛들이 밀려오는 그 무렵 나무들의 푸른빛은 극에 이르기 시작한다 바로 어둠이 오기 전 너무나도 아득해서 가까운 혹은 먼 겹겹의 산 능선 그 산 빛과도 같은 우울한 블루 이제 푸른빛은 더 이상 위안이 아니다 그 저녁 무렵이면 나무들의 숲 보이지 않는 뿌리들의 가지들로부터 울려나오는 노래가 있다 귀 기울이면 오랜 나무들의 고요한 것들 속에는 텅 비어 울리는 소리가 있다 그 때마다 엄습하며 내 무릎을 꺾는 흑백의 시간 이것이 회한이라는 것인지 산다는 것은 이렇게도 흔들리는 것인가 이 완강한 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나는 길들여졌으므로 그의 상처가 나의 무덤이 되었다 검은 나무에 다가갔다 첼로의 가장 낮고 무거운 현이 가슴을 베었다 텅 비어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