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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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지우신다 / 이경림Photoessay 2019. 11. 11. 15:17
어머니, 지우신다 / 이경림 휑한 방에 누워 자꾸 지우신다 장롱만한 지우개로 삯뜨개질의 날들을 지우신다 지워도 자꾸 풀려나오는 실꾸리, 실같이 가는 기억의 구멍이 점점 커진다 실꾸리가 구멍 저편으로 떨어진다, 그 속에 팔을 넣고 휘젓는 어머니, 한 실마리가 잡. 혔. 다. 친친 감긴 한시절이 끌려나온다 치마꼬리에 매달린 죽은 아들, 찐 고구마, 없는 치료비......, 욕설의 날들이, 찬 고구마가 담긴 소쿠리 위로 오색 날개의 퉁퉁한 치욕들이 윙윙 난다 저리 가! 쫓아도 자꾸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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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2 / 기형도Photoessay 2019. 11. 11. 15:12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2 / 기형도 슬프구나 벌레 먹은 햇빛은 너무도 쇠잔하여 마른 풀잎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이제 한 도막 볏짚만큼 짧은 가을도 숨죽여 지나가고 적막한 벌판에 허수아비 하나 남아 마른 수건처럼 쓸쓸한 가을 임종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 그리하여 앙상한 빈 들엔 시간이 가파르게 이동하고 이치를 아는 바람의 무리만이 생각난 듯 희뜩희뜩 떠다닐 것이다. 곧 밤이 되리니 겹쳐 꾸는 꿈속에서 암초에 걸린 맨발로 핼쑥한 하얀 달 하나 떠오르고 기진한 덩굴손 같은 달빛 몇 줄기로 단단히 동여맨 가을의 시체를 끌고 이리저리 떠돌다 새벽이면 세상 빈자리마다 얼어붙은 땀을 쏘며 사라질 것이다. 죽음이여, 그러나 언제 우리가 너를 두려워했던 적이 있었던가 상식으로 무장한 이 세상에서 새로 태어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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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참나무 숲으로 가자 / 은숙Photoessay 2019. 11. 11. 15:10
갈참나무 숲으로 가자 / 은숙 나의 사랑은 늘 불온하였다 견뎌내거나 견뎌내지 못한 시간이 시월의 저녁 아래 낮게 엎드리고 갈참나무 매달린 저 작은 열매가 이 계절의 정수리에 아프도록 빛난다 굳어버린 생채기만 단단한 옹이로 키우며 어설픈 열매조차 맺지 못한 내 불온한 사랑은 저녁 갈참나무 숲에 와서 무릎을 꿇는다 그대여 나여 지나간 사랑이여 갈참나무 저 작은 도토리처럼 떫은 몸 스스로를 몇 번이고 씻어내며 지워 거친 밥상 따뜻하게 채우는 양식이 되거나 해거름 쓸쓸한 가지로 날아드는 새에게 푸근한 둥지 자리조차 내어주지 못한 척박한 묵정밭의 생애여 시월의 저녁 지금도 붉나무 잎새는 눈부시게 더욱 붉어지고 넉넉한 과즙의 사과 익어가며 수런거리는데 후줄근히 구겨진 내 사랑의 허물은 갈참나무 숲에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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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기쁨에게 / 정호승Photoessay 2019. 11. 11. 15:08
슬픔이 기쁨에게 /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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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가 당신이예요 - 김용택Photoessay 2019. 8. 29. 15:50
그이가 당신이예요 - 김용택 나의 치부를 가장 많이 알고도 나의 사람으로 남아 있는이가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 사람이 당신입니다 나의 가장 부끄럽고도 죄스러운 모습을 통째로 알고 계시는 사람이 나를 가장 사랑하는 분일 터이지요 그분이 당신입니다 나의 아흔아홉 잘못을 전부 알고도 한점 나의 가능성을 그 잘못 위에 놓으시는 이가 나를 가장 사랑하는 이일 테지요 그이가 당신입니다 나는 그런 당신의 사랑이고 싶어요 당신의 한점 가능성이 모든 걸 능가하리라는 것을 나는 세상 끝까지 믿을래요 나는, 나는 당신의 하늘에 첫눈 같은 사랑입니다. Crossroads Part 4 - Guido Negrasz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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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같은 사랑 - 유미성Photoessay 2019. 8. 29. 15:47
그림자 같은 사랑 - 유미성 낮에도 별은 뜨지만 눈부신 태양빛에 가려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듯이 나 언제나 당신 곁에 서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에 가려 당신위 눈에 보이지 않나 봐요 나, 밤마다 뜨고 지는 별이 아니라 늘 당신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림자 같은 사랑인데 당신은 보이는 것들만 믿으려 하시는군요 마음 속에 담아두고 보여지 못하는 사랑은 끝내 외면하려 하시는군요 나 그렇게 당신의 그림자 같은 사랑인데…… Clear Waters - Llewelly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