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사람의 봄날 / 박서영Bookmark 2015. 2. 4. 18:57
이사 다닌 집들이 눈사람처럼 녹아 사라져버렸다 환한 벚꽃이 깨진 창문을 잠시 엿보다 가버리고 이후의 긴 그늘에 대해선 모두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런 국도를 지나쳐, 지나쳐온 봄날이었다 길고양이 한 마리처럼 도시 외곽에서 달을 분양받았지만 나의 열망은 달과 태양을 제본하는 것 한겨울에 만든 눈사람을 한여름에도 들여다보는 것 태양의 밀짚모자를 쓴 채 달의 털모자를 쓴 채 태양과 달은 서로의 표정을 사각사각 베어 먹고 있다 그러니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는 뜨겁고 차가운 두 얼굴은 그냥 놔두시길, 괜한 관심으로 눈썹과 코와 입술을 그려 넣지 마시길, 지금은 눈사람처럼 녹아내리고 있는 집에 들어가 그해의 환했던 벚꽃과 어느 여름밤의 뜨거운 포옹과 술렁이는 꽃그늘 따위를 모두 들고 나오고 싶은 날이다 어쩌면 이미 누군가 청소하면서 다 치워버렸을 쓸모없이 소중하고 궁핍한 기억들 말이다 눈사람의 봄날 / 박서영